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(문단 편집) === 출생 === 1778년 [[베르사유 궁전]]에서 태어났다. 비록 왕위계승자인 왕자는 아니었지만 [[루이 16세]] 부부가 혼인한 지 무려 7년 만에 태어나 많은 축복을 받았고 국왕 부부에게도 첫 아이 마리 테레즈는 아들딸을 막론하고 큰 기쁨이었다. [[마리 앙투아네트]]는 아이의 성별을 듣고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지만 훗날 시녀 마담 캉팡의 회고록에 쓰일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. >"'''불쌍한 어린 것, 너는 [[아들|그들이 바라던 아이]]는 아니야.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.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아들이 되었겠지만, 너는 나의 것이야. 너는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, 내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.'''" - [[마리 앙투아네트]] 루이 16세는 외설적인 시와 노골적 팜플랫으로 왕국의 가장 낮은 신민들로부터까지 받아야 했던 모욕에서 벗어나고, 평소에도 아이들을 좋아하고 모성애가 남달랐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리 테레즈의 탄생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. 여담으로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[* 이는 아이를 [[바꿔치기]]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. [[철가면(프랑스)|철가면]]과 [[루이 14세]]가 쌍둥이 형제라는 설이 부정되는 이유가, 다름아닌 이 관행 때문에 '정말 쌍둥이였다면 분명 본 사람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'이다.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정말 '아무나'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.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 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. 도중에 그 백작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.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.], 이 때 창문을 모조리 닫아놔 환기도 안되는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 했다고 한다. 때문에 루이 16세는 산모의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친인척 등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. 더군다나 담당 궁의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, 아이를 낳은 후 바로 기절했다. 그 후에는 출산 후유증으로 인한 [[치질]]로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